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폰 노이만 (문단 편집) ==== 핵무기 개발 ==== 1937년,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[[중위]] 시험인 미국 [[육군]]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(USAR)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다. 그는 쉽게 [[시험]]을 통과하지만, 궁극적으로 그의 [[나이]]로 인해 거부되었다.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. 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[[나치 독일]]과의 전쟁은 [[수치해석]]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.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,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다.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,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다.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"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"이라는 것이 있다. 이 이론은 [[히로시마]]와 [[나가사키]]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다. [[원자 폭탄]] 개발을 위한 [[맨해튼 프로젝트]]에 참여했을 때 [[나가사키]]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[[팻 맨]]을 위한 [[폭축렌즈]]의 개발을 담당했다.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[[깎은 정이십면체|32면체]]에 배치함으로써 [[원자 폭탄]]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. 폰 노이만은 [[미국]]과의 교전국이던 [[일본]]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,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[[문화재]]가 많은 도시였던 [[교토]]에 대해 "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."고 주장했다.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[[도쿄 대공습]]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다.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이 반대해 대신 [[히로시마]]로 정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